남해의 제왕(帝)은 ‘숙’이고 북해의 제왕은 ‘홀’이고 중앙의 제왕은 ‘혼돈’이다. ‘숙’과 ‘홀’이 때때로 ‘혼돈’의 땅에서 함께 만났는데, ‘혼돈’이 그들을 매우 잘 대접하였다. ‘숙’과 ‘홀’이 혼돈의 은덕에 보답하려고 함께 상의하여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이 혼돈만은 있지 않으니, 시험 삼아 구멍을 뚫어줍시다.” 하였다. 하루에 한 구멍씩 뚫었더니 칠 일만에 혼돈이 죽어버렸다.
혼돈이 죽은 이유
南海之帝爲儵 北海之帝爲忽 中央之帝爲渾沌
儵與忽 時相與遇於渾沌之地 渾沌待之甚善 儵與忽謀報渾沌之德
曰 人皆有七竅 以視聽食息 此獨無有 嘗試鑿之
日鑿一竅 七日而渾沌死 ―「應帝王」
혼돈은 구멍이 뚫려서 죽었다
등장인물인 ‘숙’과 ‘홀’은 각각 남해와 북해의 왕이다. ‘혼돈’은 중앙의 왕이다. 일화는 ‘숙’과 ‘홀’이 ‘혼돈’에게 대접을 잘 받고 그 은덕에 보답하려고 얼굴에 7개의 구멍을 뚫어주었다는 비교적 짧은 내용이다. 그러나 이 일화에는 반전이 있다. ‘숙’과 ‘홀’이 뚫어준 구멍 때문에 ‘혼돈’이 죽은 것이다. 의도와 결과가 모두 황당하지만 누구에게는 매우 비극적 이다.
그렇다면 ‘혼돈’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장자』의 이 일화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장자』 전반에 드러난 주된 사유의 맥락 안에서 ‘혼돈’의 죽음은 인위적인 것에 대한 거부로 이해될 수 있다. 특히 이 이야기에서 인위적인 것은 타인이 만든 판단 기준에서 비롯된 것을 말한다. 이를 통해 누군가의 생각을 모든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숙’과 ‘홀’은 자신의 관점에서 ‘혼돈’을 판단했다. 그들이 뚫어준 7개의 구멍은 그 구멍을 지니고 태어난 ‘숙’과 ‘홀’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혼돈’의 상황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구멍이었다.
여기에 7개의 구멍이 상징하는 바는 이 일화의 의도를 더욱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들이 ‘혼돈’에게 뚫은 7개의 구멍은 얼굴에 붙어 있는 눈, 코, 귀, 입의 구멍을 말한다. 이것은 나를 외부의 대상, 즉 바깥세상과 연결해주는 감각기관이다. 또한, 7이라는 숫자는 인간에게 욕망을 만드는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일곱 가지 감정과도 연관되어 있다.02 인간은 이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대상을 접하며, 여기에서 어떠한 감정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감정의 축적에 의해 만들어진 생각이나 느낌은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고, 이것을 판단의 근거나 기준으로 삼게 된다. 결국, 장자는 7개의 구멍을 통해 개인의 경험으로 형성된 주관적 판단의 위험성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좋은 것이 다 좋은 것이 아니다
혼돈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을 너무 쉽게 자신만의 잣대로 봐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는다. 내가 좋다고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것이 아니다. 상대방은 상대방이 살아가는 방법이 있고 나에게 좋은 것이 그에게도 좋은 것이 아니다.